블로그 이미지
길거리를 지나다 눈에 들어오는 작은 들꽃처럼 그저 스쳐가기 쉬운 아름다운 순간들을 정감있는 시선으로 함께 나누는 공간입니다.
by 바다시선

NOTICE

CALENDAR

«   2024/05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TAG CLOUD

  • Total :
  • Today :  | Yesterday :

CATEGORY

분류 전체보기 (18)
일상의 풍경을 쓰다 (4)
별 하나 그리움 하나 (4)
오늘은 뭐 먹을까 (4)
북 힐링 이야기 (2)
여행을 떠나자 (1)
시 한모금 차 한모금 (0)
취미는 뭔가요 (1)

RECENT ARTICLE

RECENT COMMENT

ARCHIVE

LINK



  1. 2019.10.16
    공중전화가 거기에 있었지
  2. 2019.10.11
    엄마밥이 먹고 싶은 날
  3. 2019.10.11
    낯 익은 글씨
  4. 2019.10.10
    오래 전 살던 풍경

 

개천절 이어서 여유로운 아침이 시작되었다.

이틀동안 티비를 아예 켜지도 않았었는데 식사를 하면서 틀어놓고 '우아한 가' 라는

드라마를 연속해서 보았다. 휴일 하루는 더욱 빠르게 지나가서 저녁식사를 하고 너무

게을러지면 안되겠다 싶어 운동화를 신고 아파트 건너편 공원으로 걷기를 나섰다.

 

공원 안에서 운동기구로 여러가지 근력운동을 하고는 공원 밖 아파트 쪽으로 넓게

걸어가고 있었다. 부지런히 걷다가 참 오랫만에 눈에 띄는 공중전화 박스가 있어

왠지 옛날 생각도 나고 정겨워서 휴대폰으로 찍었다.

 

공중전화박스를 지나 토박토박 걸어가다가 문득 대학교 때 기억이 떠올랐다.

추운 겨울날 집에서 통화하기 불편해서 덜덜 떨면서 오랫동안 남자친구랑 전화했던

기억이 났다. 그때는 삐삐도 휴대전화도 없던 시절이었으니까.

친구가 "밖에서 오래 전화 하느라 많이 춥겠다" 했었던 것 같은데 나는 "아니, 두껍게

입고 나와서 하나도 안추워" 그랬었다.

사실은 엄청 추워서 덜덜 떨었지만 조금이라도 더 오래 통화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 했으니.

애틋한 모습 생각하면서 좋아하는 남친 목소리 듣는데 추운것은 전혀 힘들지 않았다.

지금은 핸드폰으로 온갖 기능을 편리하게 쓸 수 있는 세상이지만 예전엔 집전화로 해서

엄마나 식구가 받아서 바꿔줘야만 통화 할 수 있는 때여서 불편한 점이 많았다.

전화가 언제 올까 하면서 집전화 옆을 지키고 있기도 하고, 그렇게 설레면서 기다려지는

그 누군가가 있어서 좋았던 시간들 이었다.

 

스무살, 지금 생각 해보면 참 고운 나이였을 때였다.

손만 잡아도 큰일 나는 줄 알 정도로 지나치게 순진했던 아주 오래 전 내 모습이 생각나

혼자 슬며시 미소가 지어진다. 다시 20대로 돌아간다면 아주 짧은 스커트도 과감히 입어보고

연애도 다양하게 해보고 싶다. 이왕 주어진 시간 좀더 넓게 경험해 보고, 배낭여행도 씩씩하게

떠날 수 있는 그런 멋진 삶을 살아 볼 것 같다.

사실 무엇을 시도하는 것에 나이가 많아서,, 라는 말은 참 치사한 자기변명 이라는 걸 알고있다.

하지만 이 나이에 그러고 다니면 다른이들 안구정화 차원에서 참는 것이 세상에 도움주는 일이

아닐까 싶다. 

오늘은 공중전화에서 오래 전 마음 설레이게 했던 그 사람에게 전화하는 상상을 해본다.

지금 어디에서 어떻게 사는지 알 수 없는 그 사람에게.

 

'별 하나 그리움 하나'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엄마밥이 먹고 싶은 날  (0) 2019.10.11
낯 익은 글씨  (0) 2019.10.11
오래 전 살던 풍경  (0) 2019.10.10
And

 

아주 오래 전 몸살로 몹시 아파서 몸져 누웠을 때 식사도 하기 힘들었던 날이었다.

배는 고픈데 먹고 싶은 것이 아무것도 없던 날, 문득 떠오르는 음식이 있었다.

학창시절 잠결에 들려오던 엄마의 음식 만드는 도마소리, 그리고 보글거리는

된장찌게가 올려져 정성껏 차려주신 엄마 밥이 너무도 그리워졌다.

돈으로는 절대 살 수 없는 그 음식을 먹으면 당장 몸이 나을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낮에 자주 만나 함께 손잡고 다니던 남대문 시장, 비좁은 자리에 서로 비비고 않아 먹던

잔치국수집, 얼마전 가보니 그 국수집은 다른 가게로 바뀌어 흔적이 없어져서 서운한 느낌이 들었다.

다들 무언가 챙겨주길 바라는 친척들 치닥거리를 묵묵히 맏며느리라는 죄목같은 이름으로

씩씩하게 해내시던 분이셨다.

엄마가 돌아가시고 아마 3년 정도는 함께 다니던 장소만 지나쳐도 눈물이 났다.

이제 다시는 같이 손잡고 올 수 없는 걸 알기에.

 

무엇인가 고민되고 결정해야 하는 일이 있을 때마다 '엄마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하고

가늠해 보는 습관이 생겼다. 이럴때 엄마가 계시면 얼마나 좋을까,

든든한 지원군이고 나무처럼 우뚝 서 계시던 그 자리.

이제 나도 엄마이고 그 자리에 서 있지만, 우리 엄마만큼 그렇게 희생적으로 해낼 수는

없다는 것을 안다.

 

평생 배우지 못한 것이 한이셨던 엄마는 자식들을 충분히 교육시켜 주셨다.

시간이 지나 언젠가 엄마를 만나면 세상에서 행복하게 잘 살다 왔다고 얘기 해드리고 싶다.

그러니 이제 남은 삶을 멋지게 하고싶은 일을 하다가 후회없이 떠날 수 있도록

용기가 필요한 순간이다.

다시 한번 날아오르고 싶기 때문이다.

중학교 때 읽었던 갈매기 조나단 처럼 날아보자.

가장 높이, 가장 멀리 후회 없도록.

'별 하나 그리움 하나'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공중전화가 거기에 있었지  (0) 2019.10.16
낯 익은 글씨  (0) 2019.10.11
오래 전 살던 풍경  (0) 2019.10.10
And

 

엄마, 나 입안이 헐어서 따가워요" 하고 응석어린 표정으로 입을 아~ 벌리면

미리 만들어 두셨던 하얀 백반가루를 입안에 발라 주시곤 했던 어린시절이 떠오른다.

나이가 들어 결혼을 하고 아마 한 40대쯤 이었던 것으로 기억 나는데

어느날 백반 덩어리를 오래도록 팬에 정성껏 볶아 고운 가루를 만들어서

두고두고 입이 헐었을 때 쓰라고 들고 오셨다.

나중에 무엇인지 모르면 안되니까 어눌한 글씨로 '백반' 이라고

또박또박 써주신 그 마음을 알것 같은 지금, 어머니 모습은 마주 할 수가 없다.

요즈음도 피곤하거나 하면 간간이 입 속이 따갑고 헐곤 하는데

그때마다 면봉에 묻혀 며칠동안 발라주면 신기하게 낫는다.

'백반'이라는 글씨를 볼때마다 엄마 마음이 생각나서 찡하다.

 

오빠만 둘 있고 막내딸로 자라나다 보니 아버지 엄마 사랑을 많이 받았다.

큰오빠랑은 8살 차이, 작은 오빠랑은 살 차이라서 서로 싸움 상대가 안되다 보니

크게 다투거나 그런 경우는 거의 없었던 듯하다.

막내이고 딸이고 하니 일 많은 우리 엄마를 좀 도와드렸으면 좋으련만

밥상에 수저 놓는 일도 시키지 않으면 하기 싫어하는 게으른 딸이었다.

9남매의 맏며느리 노릇을 하느라 삼촌, 고모들을 차례로 결혼 시키느라 애쓰고

시골에 사는 사촌조카들이 조금 아프거나 하면 서울 우리집으로 올려보내

치료해 달라고 하기도 했다.

그 모든 치닥거리를 묵묵히 해내시는 엄마를 왜 그리도 도와드리는 일손이

되어 드리지 못했는지 못내 죄송한 마음 가득하다.

 

양반집 여자들은 글을 배우거나 교육을 시키지 않는 관습 때문에

학교에 다니신 적이 없었다.

한글을 꺠우치신 것도 몰래 숨어서 야학에서 어깨너머로

배우셨다고 한다.

평생 배우지 못한 것이 깊은 한이 맺혀서

자식들 셋은 모두 서울에서 대학을 보내 가르치셨다.

학교에 다니신 적이 없지만, 타고난 지혜로움과 명석한 두뇌로

집안일 처리하시는 현명함을 갖추셨고 집안을 부유하게 일구시는데 뛰어난 능력을 보이셨다.

 

살아계실 때 모습으로 마주 할 수 없지만

마음 속 깊은 곳에

엄마의 깊은 지혜를 생각하면서

삶의 기준을 잡곤 한다.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는 분이셨으며,

가장 좋은 친구였던 엄마가 나의 어머니 이셔서 참 고마울 따름이다.

나이 들어갈수록 순간순간 문득 내가 엄마를 많이 닮아간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은 어디에선가 행복하게 태어나셔서

더 멋진 삶을 살고 계실거라고 믿는다.

나에게 주어진 삶을 행복하고 감사하게 걸어간다면

나중에 엄마를 만나면 활짝 웃으며 반갑게 안으며 토닥여 드리면서

이렇게 얘기하고 싶다.

"제 곁에 머무시는 동안 정말 행복했고 참 많이 존경하고 사랑해요" 라고.

 

'별 하나 그리움 하나'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공중전화가 거기에 있었지  (0) 2019.10.16
엄마밥이 먹고 싶은 날  (0) 2019.10.11
오래 전 살던 풍경  (0) 2019.10.10
And

 

사진을 뒤적이다가 오래전 경제적으로 풍족하지 않았던 시기에

책꽂이를 사지 않고 책상 위나 바닥에 책을 줄지어 올려놓곤 했다.

물론 아무리 여유가 없더라도 책장 하나쯤 살 수 없었던 것은 아니었고

작은 방에 이것저것 가구를 들여 공간이 좁아지지 않게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동창이 미국에 사는 친구언니가 그려서 보내준 그림을 집들이 선물 겸

액자에 넣어 2점을 선물해 주었다.

 

공간이 좁으면 좁은대로, 책장이 없으면 없는대로 비를 피할 수 있는

집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고마운가 생각했다.

책장에 전시하듯 꽂아 놓는 것보다 액자받침으로 쓰다가 읽고 싶으면

하나씩 꺼내 읽으면 되니까 오히려 나름 꽤 운치가 있다고 생각이 들었다.

 

돈이 없어도 밖에 나가서 궁색한 티 내지 않았고 이러저리 발품 팔아서

5천원 짜리 옷을 입어도 사람들이 비싼 옷 입었을 거라고 생각해 주어

다행이었다.

저 사진을 찍은 때가 어느새 아주 오래전 일이 되었다.

너무 힘들 때는 초라한 것보다는 죽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때도 여러번 있었다.

 

집에서는 못 견디게 고통스러워 혼자 울다가도

밖에 나가 다른사람들과 어울릴 때면 언제나 웃고 있었다.

다시 집에 오면 마음 아파 많이 울었던 것 같다.

자존심이 강하다 보니 남들에게 초라한 모습

절대 보이지 않는 편이라 더욱 그랬다.

 

이제 그러한 일들이 아주 오래 전 기억으로 희미해져 간다.

하지만 그 시간들을 감사함으로 잘 지나온 자신을 향해

행복한 미소를 지어주고 싶다.

한동안 주어졌던 모든 부분을 스스로 내려놓고

빈 마음으로 다시 시작했던 용기가

소심하고 내성적인 나의 어디에서 나왔는지 신기할 뿐이다.

 

앞으로 더욱 새로워지고 풍요로워 지기로 했다.

어떤 핑계도 대지않고 다시 크게 도약해보고 싶다.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이 진정 얼마나 소중하고 사랑이 가득한 존재인지

깨닫고 세상과 그 풍요와 사랑을 나누고 싶다.

지난 시간을 기억하는 지금

언제보다도 가장 행복한 순간이다.

'별 하나 그리움 하나'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공중전화가 거기에 있었지  (0) 2019.10.16
엄마밥이 먹고 싶은 날  (0) 2019.10.11
낯 익은 글씨  (0) 2019.10.11
And